
4월에 파리에서 방문한 David Hockney 25 에서도, 몇일 전 가볍게 둘러 본 테이트 모던에서도 호크니의 《나의 부모》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림의 전시 여부는 미술관 홈페이지에서 손쉽게 확인할 수 있을테지만 그냥 왠지 이 그림은 설렁설렁 둘러보다가 우연(인 것 마냥)히 마주쳤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나의 부모》라는 이름의 이 작품에서 데이비드 호크니는 관찰자를 초대하되 무심하게 초대한다. 이 무심한 초대는 우선 두 개의 인물로 나뉜다: 한편으로는 어머니가 관찰자에게 지긋이 시선을 보내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두꺼운 책을 들여다 보느라 여념이 없다. 그럼에도 어머니의 정제된 다소곳함을 취소하는 것은 아버지의 편안한 흐트러짐이다. 관찰자에게 애정을 주고 있는 것은 어머니인 걸까, 아버지인 걸까? 실은 둘 모두일 것이며, 거기에 나름의 방식이 있을 뿐이다. 조용히 눈길을 끊지 않는 어머니와 ‘어 그래 왔냐’고 툭 던지는 아버지 운운. – 뭐라고 묘사해도 좋겠지만, 이 모든 광경을 다소 비현실적인 것으로, 나아가 이 그림 자체를 뛰어나게 독특한 것으로 만드는 장치는 화폭의 가운데 즈음 비치된 거울이다. 관찰자가 비칠 법한 위치에 놓인 이 거울은 맞은편의 벽면만을 비출 뿐으로, 관찰자의 자리를 ‘적극적으로’ 빈자리로 만들어 버린다. 어머니와 시선을 교환하면서 아버지를 응시하는 자식은 과연 어디에 있는 걸까? 이 자리는 본디 그림을 그리고 있는 호크니 자신의 자리일 것이다. 그러나 이 부모는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진 《나의 부모》다. 그들은 단지 호크니 자신의 부모로 머물지 않고 부모됨의 이상적 ‘이마고’로 승화되어야 한다. 어쩌면 그것이 호크니가 제 부모에게 바칠 수 있는 제일 큰 경의일지도 모른다. 바로 이를 위해 그는 관찰자의, 그러니까 자기 자신의 존재를 삭제해 버리는 게 아닐까? 호크니가 이로써 포기하는 것은 현전적 관찰자로서의 소유권이고 혈육으로서의 상속권이다. 지금 여기서 부모를 직접 보면서 수고롭게 그리고 있는 이 내가 멀리 떠나도, 혹여 죽어 사라져도, 그들은 여전히 나의 부모다. 나아가 이 부모는 단지 나만의 부모인 것조차 아니다. 거울은 아무도 비추고 있지 않다. 그들은 누구의 부모도 아니어서 모두의 부모일 수 있다. 이 그림에 스민 정갈한 온기, 호들갑 없는 따뜻함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어서 모두의 것일 수 있다. 누구나 이 그림 안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갈 수 있다. 아버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어머니의 백발을 쓰다듬고, 거울 옆의 화병 내음을 맡고… 그리고 거울을 들여다 보면, 거기 모든 자식이 있다.
*잘 보면 수납장 하단에 샤르댕 화집이 놓여 있다. 과문하지만, 내 식대로 요약하자면 샤르댕은 정물을 실로 정물로서 해방시킨 화가다. 샤르댕과 함께 정물은 더이상 무언가의 은유가 아닌, ‘그냥 단순한’ 정물이 되었다. 이 그림에 하필 샤르댕의 이름을 기입해뒀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해독을 요구한다. 이는 호크니의 재치다. 그는 제 부모를 정물still life, nature morte로서 여기 붙들어 두려고 한게 아닐까? ‘정물’로서의 ‘초상’인 셈이다.
**거울 안에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세례 그림이 비치는 것 또한 재미있다. 샤르댕에 비추어(혹은 구도의 면에서는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의 천장을 장식하는 샹들리에에 켜진 촛불과도 연결시킬 수도 있을듯 하다) 더욱 풍부한 해석이야 여러가지로 가능할 것 같다만… 그냥 그림이 너무 좋아서 멋도 모르면서 막 쓴다. 그림에 관한 글 쓸 때마다 떠오르는 미술/미술사 공부하는 몇몇 친구들의 얼굴이 제 초자아십니다… 틀리면 어떡하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치키치키챠카챠카초코초코쵸…
***아래 그림이 말하자면 저 그림의 ‘원본’일 것이다. “My Parents and Myself”(1975)가 그냥 “My Parents”(1977)가 되는 이 반복과 감산이 흥미로운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