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휴 써야지 뭐 어떡해

“하지만 그것들은 아름답고 숭고한 것으로 변형될 수 있습니다.”

김현은 문학이 무용해서 유용하다고 썼다.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 문학은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으로 만들고, 그래서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기만을 날카롭게 고발한다.” 이제나 저제나 감동적인 글이지만, 의문이 있다. 무용하다면, 그냥 무용한 것 아닐까? 거기 붙는 모든 변호는 그것의 무용성을 재차 승인할 뿐인 것 아닐까? 문학이 아니라도 우리는 인간의 기만성을 얼마든지 고발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유독 문학이 그런 고발을 더 효과적으로 수행하는가? 잘 모르겠다.

예전에는 U2를 좋아하는 인종차별주의자 같은 것이 가능하지 않으리라고 믿었지만, 요즘 생각기로는 미문(美文)은 민주주의는 물론이고 평등이니 정의니 하는 커다란 가치와 본질적 연관관계를 가지지 않는 것 같다. 오스카 와일드는 단언한다. “예술은 모두 쓸모없는 것이다.” 비단 문학에만 적용되는 혐의는 아니겠지만, 문필가의 삶은 종종 자기 작품의 위대함을 배반한다. 미당 전집 발간에 즈음하여 있었던 논쟁은 둘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의 문제일 터이다. 그런데 문학적 위대함이 구체적 부정의를 무화시킬 수 없듯 구체적 부정의도 문학적 위대함을 말소할 수 없다면, 사실 양자는 원래부터 별 상관없었던 것 아닐까? 아름다운 것은 부정의하게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다. 당대의 통념을 배신하면서 스캔들이 되는 아름다움은 그런 부정의한 아름다움의 작은 아종에 불과하다.

때때로 예술은 지나치게 안전한 것이어서 일부러 문제를 일으키는 것처럼도 보인다. 1974년,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리듬 0>라는 표제 아래 여섯 시간 동안 스스로의 신체를 대상화하여 전시했다. 그녀는 탁자 위에 72가지의 “쾌락의 도구”와 “파괴의 도구”를 두고 관객들로 하여금 그녀에게 그것을 사용하도록 초대하며, “기획 중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지겠다고 했다. 뒷이야기는 뻔하다. 그녀는 거친 손길의 대상이 되었다. 관객들은 키스하고 애무하고 옷을 찢고 살을 베고 피를 빨고 머리에 권총을 겨눴다. 그녀는 이 기획이 “우리 내부에 숨어있는 잔혹한 인간성을 폭로”했다고 자평하며, “기회만 주어지면 대부분의 ‘정상적’인 관중은 폭도로 변하고 만도”고 이야기했다. 이 기획 자체의 흥미로움과는 별개로 그런 평은 조금 미련한 게 아닌가 싶다. 인간의 잔혹함은 새삼스러운 폭로를 필요로 하기에는 너무 오래된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인간은 그럴 만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응당 그렇게 행동한다. 관건은 그런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교류 체계를 구축하는 데에, 그 구축 가능성을 암시하는 데에 있다. 일부러 그런 기회를 제공하면서 인간을 시험해보는 것이야말로 악취미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예술이 세상을 구할 수도 바꿀 수도 없다고 말하면서, 자기 활동의 궁극적 무의미함을 개개인이 연약함으로 이어지는 연대 가능성을 통해 보충하려 한다. “세상은 각성된 개인이 모두 실천할 때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예술은 세상이 나아갈 길은 보여줄 수 있어요. 하지만 의식의 변화는 개인이 이루는 겁니다. […] 개인 각자는 평범한 대중이 아닙니다. 이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이고, 저는 그들과 연결되어 머무는 겁니다. 모마 퍼포먼스에서 중요했던 건 아주 약한 존재로 제가 마음을 열고 있었다는 것인데, 우리 개개인은 그렇게 연약함을 드러내며 연대를 이뤄나갈 수 있습니다.” 그녀는 가장 개인적인 순간의 보편성을 주장하며 연약한 고독으로써 연대하기를 추구한다. 이는 미학적 개인주의의 전형이다. 그러나 밀실에서 인간이 하는 짓이란 대개 음험하지 않은가? 아브라모비치의 작품을 그녀 자신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 바로 그 연약한 개인들이 각자 또 평범한 대중이자 잔인한 폭도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실은 개인이라는 관념도 우중이라는 관념도 모두 지나치게 신화화됐다. 아닌 게 아니라 누군가는 <리듬 0>를 두고 ‘인간은 내면의 야수성을 지나치게 억압받고 있다’고도 짐짓 평할 수 있다. 물론 그런 억압이라면 무척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혹은 적어도, 그런 야수적 역량을 어떤 식으로든 소화시켜낼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특정한 관념을 신비화하고 불가해로써 곧장 정당화해버리는 태도다.

“살인의 충동은 결코 제거되지 않을 겁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동물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동물로서 인간은 잔인해질 능력을 갖고 있고, 타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 쾌락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이건 근절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다만 이것이 우리가 살인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환원 불가능한 이 충동을 조절하는 것이 철학과 사유의 결정적인 기능 중 하나입니다. 잔인함과 공격성은 항상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아름답고 숭고한 것으로 변형될 수 있습니다. 내가 글을 쓸 때, 글을 쓴다는 행위에는 공격성의 요소가 들어 있지만, [동시에] 그 행위는 공격성을 어떤 유용한 것으로 변형시키고자 애쓰는 것이지요. 공격성은 살인보다 더 흥미로운 것으로 변형될 수 있습니다.” (Jacques Derri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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