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휴 써야지 뭐 어떡해

Silver Monk (은빛 수도사)

파리 여행 내내 아이스티를 벌컥벌컥 들이킨 후 잔에 남은 조각 얼음까지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을 정도의 맹더위를 견뎌내면서도, 막상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늦가을에나 어울리는 샤르트뢰즈를 마셨다. 게다가 평소 같으면 그린 샤르트뢰즈를 홀짝였을텐데, 기묘하게도 이번에는 옐로우 샤르트뢰즈가 들어간 Silver Monk를 식후주로 자주 마셨다.

Silver Monk는 통상적으로 데킬라, 옐로우 샤르트뢰즈, 오이, 민트, 약간의 소금과 시럽, 라임주스로 만든다. ‘Monk’가 들어가는 이름의 칵테일에는 당연히 수도회와 연관된 재료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샤르트뢰즈는 프랑스의 카르투시안 수도회에서 약 17세기부터 내려오는 레시피로 만들었다고 한다. 대체로 허벌 리큐르들은 약용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지나 경험상 이런 얘기는 한 반 정도만 믿으면 될 거 같다. 그랬다손 쳐도 약용보단 점차 수도사들의 길고 고된 수도 생활의 몇 안되는 벗 같은 게 되지 않았을까? 한 잔 마시면서 책도 파고 행성도 관찰하고 종이접기도 하고… 감자 캐다가 소맷자락에 숨겨놓은 걸 홀짝하기도 하고… 누구나 유희와 노동의 벗이 필요한 법이다.

100가지 이상의 허브가 들어가고, 이 계열이 늘 그렇듯 레시피는 비밀이다. (근데 또 막 안달 날 정도로 궁금하진 않다.)

오컬트물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서 어렸을 적엔 ‘수도회’자가 들어가면 마냥 무섭고 신비롭게만 느껴졌지만 이제는 별 감흥 없이 읽는다. 제정분리가 안 되어있고 복지가 전무했던 시절 이 같은 종교시설이 행했던 커뮤니티 내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면 오랜 리큐르의 탄생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필연적으로 다가온다. 아마도 수도사들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분쟁을 중재하고 윤리 기준을 지도하고, 오늘날로 따지면 복지사각지대에 놓인 주민을 보살피고, 때로 약국, 의원, 정신과 상담의의 역할까지 (야매로)맡았을 거로 추정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영적’ 지도는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와중 약용의 뭔가를 개발하는 건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 않았을까? 아스피린이나 훼스탈 같은 게 없던 시절이니 감기든 심장병이든 급체든 하나로 퉁쳐서 수면연장이니 자양강장이니 하는 종합 치료제격의 약이 필요했을 것이고, 아무리 종교단체라 해도 자급할 수 있는 품목은 한정되었을테니 벌이의 수단의 면에서도 그랬을 터이다.

아무튼, 이름에 이끌려 주문한 후 실버몽크의 레시피를 검색해봤을 때 맛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데킬라, 샤르트뢰즈의 조합도 상당히 생소한데, 거기에 오이, 소금, 민트라니. 반신반의했는데 조합은 훌륭하다. 자기 주장 강한 재료들이 다 살아있는 한편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도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촘촘한 느낌이다. 짙은 허벌한 풍미나 오이에 거부감이 없다면 충분히 반가워할 맛이다. 데킬라와 라임의 톡 쏘는 스파이시함, 오이의 시원함, 미세한 짭쪼름함, 약초향의 층이 흥미롭다.

은빛 수도사. 엄숙하고 자애로운 수도사보다는 초로의, 코가 빨갛고, 익살맞고, 조금 굼뜨고, 껄렁한 농담을 일삼고, 술 좋아하는 그런 동네 아재 같은 이를 상상해본다. 가니시는 타임이나 오이가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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