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랑 함께 여행하면서, 혼자였더라면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곳들을 찾아갔다. 우려했던 대로 질색한 관광지(가령 버킹엄 궁전)가 대부분이었지만 뜻밖에도 흥미롭게 둘러본 곳들이 있었다. 템즈강 유람선을 타고 들른 커티삭호(Cutty Sark)는 그런 예외 중 하나였다.
그리니치 부두 한켠에 영구 정박되어 있는 커티삭 호는 영국의 쾌속범선이었다. 1869년에 주조된 이 범선은 당시 중국에서 영국으로 차를 운반해오던 가장 빠른 범선 중 하나였다고 한다. ‘커티삭(Cutty Sark)’이라는 이름은 스코틀랜드어로 짧은 치마를 뜻하며, 시인 로버트 번스의 시 「Tam o’ Shanter」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라고도 하는데, 이게 커티삭호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그리고 유명세로 치면 범선을 앞질러도 한참 앞지른 블렌디드 위스키 ‘커티삭’과 어떻게 엮이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아빠는 선박의 구조와 속도에 넋이 나간 와중에 이 배를 둘러싼 대영제국의 해양 패권사를 내게 숨 돌릴 틈 없이 퍼부었고, 나는 멀찍이 하루키에 대한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소설 1Q84에서 아오마메는 커티삭하이볼을 주문하는 남자를 원나잇스탠드의 상대로 선택하고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 같은 술을 시킨다. 싱글 몰트 따위 가려서 마시는 짐짓 까다로운 듯한 사람은 침대에서 그저그렇다는 게 아오마메의 지혜로운 의견이다.
가끔은 커티삭처럼 개성 없고 마일드한 술이 너무 좋다. 술에 물탄 듯, 물에 술 탄듯 하이볼로 마시면 천천히, 오래, 많이 마실 수 있고… 그러고 보니 ‘천천히. 오래. 많이.’가 아오마메가 원하는 밤의 모습이었을 수ㄷ… 쿨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