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휴 써야지 뭐 어떡해

Glendronach 18 Year Allardice

하루종일 하이랜드 지역을 빼곡히 여행하느라 기운이 바닥난 상태다.

예상대로 어딜가나 안개가 자욱했고, 예상치 못하게 자욱한 안개는 별다른 신비로움을 주지 못했다. 글렌코(Glencoe)와 글렌피난(Glenfinnan)을 둘러보는 내내 ‘날씨가 맑았더라면 나무로 빽빽하게 우거진 숲 풍경이 더 광활하고 풍부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었다. (아니면 차라리 폭풍우 휘몰아치는 풍경 한 가운데서 터벅터벅 걷는 경험을 원했던 걸 수도 있겠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에는 글렌코 학살에 대해 검색해 보느라 여념 없었고, 우려와는 달리 멀미 하지 않았다. 달위니(Dalwhinnie) 증류소를 그냥 지나쳤을 때는 마음이 무척 쓰라렸다.

하여, 오늘도 어쩔 수 없이 쓰라린 상처를 알코올로 소독해야만 한다.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고연산 위스키에는 별로 눈길을 주지 않는다. 터무니없이 비싸기도 하고 동종의 고연산을 마실 바엔 다른 라벨이나 캐스크를 마셔보자 주의다. 물론 맥켈란 25년 같은 건 정말 훌륭하다. 첫 경험에서 나도 모르게 이건 술이 아니라 약이라는 생각이 튀어나왔을 정도였다. 30년산보다 시트러스와 밀향이 짙은 발렌타인 21년도 아주 좋아하긴 한다. 오늘 처음 접한 글렌드로낙 18년 알라디스 셰리캐스트도 게임체인져였다. 비싸서 고심 끝에 반 잔 주문해서 마셨다. 발베니 15년 셰리캐스크가 요즘 기근이기도 해서 가물가물해진 셰리캐스크의 향과 맛을 환기시킬 겸, 상처도 소독할 겸… 겸사겸사.

바디감과 셰리의 풍미가 방종하리만치 풍부하다. 버터크림, 퍼지, 건포도, 초콜릿, 졸인 설탕, 아몬드. 아마 바디용품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아실 텐데, 날씨가 선선해지면 생각나는 시어버터나 코코넛오일이 듬뿍 들어간 리치한 바디크림 같은 달콤고소함이 바로 여기 있다. 보통 드로낙은 향이 복잡하다고 많이들 설명하는 것 같은데 내가 느끼기에는 밸런스가 좋아서인지 관능적이고도 단순하다. 과일도 있지만, 캐러멜과 함께 오랜 시간 졸이거나 초콜릿으로 코팅된 과일이다. 여기에 꽤 우디한 라스트 노트가 아주 오랫동안 뒤따른다. 라프로익 트리플우드의 우디함과 비교하자면, 트리풀우드의 우디함이 빳빳한 고재의 요철에서 흘러나오는 우디함이라면, 드로낙의 우디함은 늘상 호두 기름을 먹이고 관리에 공을 들여 표면이 반질반질한 나무에서 날 듯한 우디함 같다. 비단결, 간결체의 흠 잡을 데 없는 한 편의 수필, 솔기 없이 무봉으로 마감한 캐시미어 제품 따위를 연상하게 된다. 충분히 값을 하는 술이지만 언제나 그렇듯 비싸서 쉬이 추천하진 못할 것 같다. (추천이고 나발이고 우선 나도 이번 드램이 처음이자 마지막 한 모금일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다. 대학원생 주머니 사정이야 뭐 늘상 그런 것이고, 18년 알라디스는 아쉽게도 이미 단종된 상태다.) 부디 취했을 때 마시지만 않으면 된다. 그러기엔 너무 아까운 드램이다. 이 술 덕에 귀갓길 발걸음이 가볍고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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