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휴 써야지 뭐 어떡해

Do Ho Suh: Walk the House at Tate Modern

테이트 모던에서 개최한 서도호 개인전을 혼자 둘러보는 것으로 런던에서의 시간을 마무리했다.

천으로 재구성된 복수의 ‘집’을 한 공간 안에 중첩시키는 서도호의 작업은, 디아스포라적 삶을 살아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낄 만한 것을 품고 있다. 그럼에도 서도호의 작품들이 유독 낯설지 않게 다가오는 건, 그가 오랜 시간 천착해 온 주제들 – ‘집’, ‘공간’, ‘정체성’, ‘이동’ 등 – 에 내가 깊이 공명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정확히 어떤 지점에서 좋았고, 또 어떤 지점에서 의구심이 들었는지에 대해 쓰고 싶은데, 솔직히 아직 잘 모르겠다. 루벤으로 돌아오자마자 시험 기간 모드로 돌입해 버린 나머지 공상할 여유가 딱히 없었다. 그래서 서도호가 아닌 백남준을 통해, ‘집’이 아닌 ‘언어’를 통해 우회적으로나마 감상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1992년 9월, 백남준은 “미디어에 대한 모든 연구는 언어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그가 보고하는 일화는 우리에게 주어진 출발점이 즉시 언어’들’임을 알린다. 일제강점기에 초등학교를 다녔던 백남준은 한국어와 일본어를 수시로 횡단하면서 유년기를 보냈는데, 그런 유년기에 대한 이야기는 “영어로” 쓰여지고 있다. 두 쪽이 채 지나지 않아 세 개의 언어가 교차한다. 그러니까 얼핏 소위 ‘언어적 전회’에 참여할 것처럼 보이는 저 첫 문장을 곧바로 고쳐 읽어야 할 것이다. ‘미디어에 대한 모든 연구는 언어들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를 비롯해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까지 6개 국어를 더듬거릴지언정 할 줄 알았던 백남준에게 이 복수성은 어쩌면 새삼스레 거론할 필요도 없을 만큼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바로 뒤에 이어지는 글 「몇몇 프랑스인(?) 친구들」의 물음표는 우리의 추측을 확증한다. 프랑스인이라는 카테고리는 자신의 프랑스인 친구들을 수식하기에 한참 미진하다. 그들은 그런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처럼 복수성은 그것만으로도 정체성, 동일성, ‘identité’에 대한 우리 사고의 결을 바꾼다.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는 이와 정반대의 장소에서 출발해서 정확히 같은 지점에 도착한다. “저는 하나의 언어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 것이 아닙니다.” 후설 연구자로 학문적 여정을 개시했고 후일 미국 유수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될 데리다는 물론 독어나 영어를 할 줄 알았다. 그런 그가 자기가 할 줄 아는 유일한 언어인 프랑스어가 자기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재학 중이던 알제(Alger)의 중학교에 프랑스 “본토” 출신의 교사가 부임했을 때의 놀라움과 연결되어 있다. 그 교사의 불어는 자신의 것과 같은 불어였지만 같은 불어가 아니었고, 여태 자신이 자신의 언어라고 생각했던 무언가가 실은 타자의 언어였음을 데리다는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언어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는 체험을 데리다는 보편적인 것으로 올려세우고자 한다.

데리다가 자신의 불어를 표준적이고 순수한 것으로 표백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은 잘 알려져 있다. 그렇게 표백하고 난 뒤 즉시 ‘오염’의 사유를 향해 질주했다는 것 역시 잘 알려져 있다. 데리다는 후일 『타자의 단일언어』로 출간된 한 강연에서 회고한다. “제대로 된 프랑스어로 말하기, 순수한 프랑스어로 말하기. … 이런 과장법(‘프랑스인보다 더 프랑스적으로’, 더 ‘순수하게 프랑스적으로’ … 나 자신이 언제나 순수성과 순수화 일반을 비판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과도하고 충동적인 극단주의를 물론 나는 학교에서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강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투리의] 억양은 공적 발화의 지성적인 위엄과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시적 발화가 지닌 자질과는 더욱 안 어울린다. … 억양은 언어 일반과 어떤 육탄전을 벌인다. 그것은 강세를 두는 것보다 더 많이 말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바벨탑보다 더 시원적인 사태다. 독일어, 일본어, 영어처럼 여러 언어들이 갈라지기 이전에 하나의 언어가 이미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 공적, 시적, 표준적, … 그리고 그 대당들. 그래서 어떤 의미로는 도대체 “하나의” 언어라는 게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누군가가 그걸 전유할 수도 없다. 안이하게 어떤 언어가 ‘자기의’ 언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의미다. (‘집’에 대해서도 동일한 통찰이 유효하지 않을까? 그리고 전시를 보는 내내 느꼈던 묘한 위화감은 서도호의 작품들이 복수의 집’들’을 이야기하는 한편, 개개의 집 또한 항상 이미 여러 개의 집들로 갈라진다는 사실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 했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언어에 대한 연구로서 미디어에 대한 연구는 이 다수성과 그에서 연유하는 전유 불가능성에 대한 연구로 귀착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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