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휴 써야지 뭐 어떡해

무한한 책임

김수로는 한 예능에서 부친의 장례식을 치르는 중에 웃음보가 터지고 말았던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장례식장에 사람이 뜸해진 새벽 무렵 외조부께서 불러다가 네가 사람 새끼냐고 꾸짖었고, 그제서야 대성통곡을 했다는 에피소드였다. 나중에 보니 웃음을 참느라 허벅지를 때리고 꼬집어서 피멍이 들어 있었다고 그랬다. 김수로는 이걸 웃긴 일화로 전달하지만, 그토록 슬픈 날 자신이 그랬다는 자책감이 아직도 해결이 되지 않는다고 눈물을 글썽이며 덧붙인다. 나는 이것이 책임질 수 없는 일을 책임지려고 하는 인간의 굴레라고 생각한다. 정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과연 김수로가 그날 웃지 않았다고 해서 자책감이 없었을까? 인간은 자신이 도저히 어찌 할 도리가 없었던 일에 대해서도 기어코 책임감을, 죄책감을 느끼고 만다. 친구와 일상적으로 약속을 잡았는데, 친구가 약속 장소에 오다가 변고를 당했다고 생각해 보자. 거기에 내 책임은 없다. 나는 무구하다. 하지만 계속 곱씹고야 마는 것이다. 그날 만나기로 하지 않았더라면, 그 장소가 아니었더라면, 그 시간이 아니었더라면, 등등. 이것은 이성의 논리도, 감성적인 책임도 아닌 무언가다: 이유를 발명해서라도 기필코 책임지려 하는 것. 아마 김수로는 저런 식이 아니었더라도 도저히 풀리지 않는, 그래서 무한한 책임의 구석을 찾아냈을 것이고, 그럼으로써 스스로 징벌을 내렸으리라고 생각한다. 아주 사소한 것조차 충분히 그런 구실이 될 수 있다. 누군가를 상실하고 나서야 애틋해진다는 건 그런 것이다. 설령 함께 지낸 그 모든 시간이 기쁨으로 충만했을지라도, 지나간 시간 전체가 회한으로 물들고 만다. 그런데 그런 충만함은 좀체 없다. 그러니까 차라리 다른 누군가가, 이를테면 외조부 같은 타자가 꾸짖어 주는 것이 티끌만큼 나은 셈이다. 자책의 회로를 간신히 외재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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