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휴 써야지 뭐 어떡해

잘 먹어야 한다

신년을 맞이하여 혼자 떡국을 끓여먹었다. 표고 버섯과 다시마로 육수를 내고, 떡을 불리고, 흰자 노른자 지단을 부치고… 여기도 드디어 농협 김치가 유통되기 시작해서 설렘 한 가득 안고 한 팩 사왔는데, 역시나 소비의 속도가 유통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건지, 뜯어보니 맛김치가 아니라 묵은지가 들어있었다. 들기름을 구할 수 없으니 묵은지 볶음을 해먹기도 애매하고, 어지간히 게으른 탓에 묵은지 김밥을 잘 말아 먹을리도 없다. 난감할때는 역시 찌개인건가. 해가 바뀌어도 관건은 잘 먹고 잘 사는 거다.

데리다와 페라리스 (그리고 바티모) 사이의 대담집인 『비밀의 취향』은 바티모의 농담으로 끝난다: “잘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재치 있는, 멋진 마무리라고 생각한다. 비단 이 대담이 식사 자리에서 벌어진 것이라서가 아니다. 바티모가 눙치듯 언급하는 “잘 먹어야 한다”는 문장은 데리다와 장-뤽 낭시 사이의 대담의 표제로 활용된 바 있다. 「‘잘 먹어야 한다’ 혹은 주체의 계산」(Cahiers Confrontation, n° 20, 1989) 여기서 섭식은 당연히 축자적이지 않고 환유적이다. 낭시와의 대담에서 섭식은 타자의 타자성을 내면화ㆍ내투사ㆍ소화하는 행위 일반의 범례적 형태로 제시되고 있으며, 이것은 ‘무엇을 먹느냐’는 문제와는 좀 다른 것이다. 즉 좋은 섭식이라는 문제는 섭식할 대상을 선별하는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 생물ㆍ인간ㆍ동물 등을 먹어도 괜찮은지, 아니면 먹지 말아야 하는지, 데리다는 이런 물음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어쨌든 먹어야 하며, 그렇다면 잘 먹어야 한다. 그리고 잘 먹는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타자와 〈함께〉 먹는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간단하게 말한다: “‘우리는 결코 혼자 먹지 않습니다. 이것이 ‘잘 먹어야 한다’의 규칙입니다. 무한한 환대의 법칙이죠.” ‘어떻게 타자와 함께 살 것인가?’는 전통적으로 윤리학의 주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정식화는 타자가 마치 우리가 견디고 인내해야만 할 대상인 것처럼 제시한다. 적어도 첫 인상으로는 그렇다. 이 물음을 ‘어떻게 타자와 함께 먹을 것인가?’로 바꾸면 사유의 결이 약간 달라지는 걸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