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많이 뒤늦은 감이 있지만, 새해 첫 영화로 《크루엘라》를 봤다.
정교하게 설계된 장면들이 빠른 호흡으로 이어지는 걸 보는 맛도 좋았고 70년대를 풍미한 넘버들로 꽉 채워진 사운드 트랙을 듣는 맛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오이디푸스 서사를 상쾌하게 뒤집는 맛이 좋았다. 크루엘라는 오이디푸스도 엘렉트라도 안티고네도 아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크루엘라》에 부친의 자리는 거의 존재하지 않고, 두 명의 어머니와 그 딸만이 존재한다. 《크루엘라》는 부성성을 새삼스레 비판하거나 부인하기 위한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는다. 마치 애초에 그런 것은 없었다는 듯, 아무래도 좋다는 듯 무관심하게 이야기를 쌓아 올릴 뿐이다. 최근(10년래) 숱하게 쏟아져 나온 페미니스트 서사들 가운데 《크루엘라》가 단연 돋보인다면 이런 상쾌한 무관심 때문이다.
주인공의 半分된 흑백의 머리가 표상하듯 극 전체는 유전적 어머니인 남작 부인과 실질적 양육자인 캐서린 밀러, 이 두 어머니의 이중구속으로 이뤄져 있다. 비정하기를 천성으로 타고난 크루엘라일 것인가 다정하도록 교육받아온 에스텔라일 것인가? 흑일 것인가 백일 것인가? 그녀의 답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ou bien, ou bien)’의 양자택일에 의해서도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ni, non plus)’의 위태로운 부정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다. 그녀는 남작 부인의 딸인 비정한 크루엘라이면서 캐서린의 딸인 다정한 에스텔라이기도 하다. 이는 그녀가 억압의 경로를 택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크루엘라이기를 택하면 에스텔라로서의 역사를 억압해야 하고, 에스텔라이기를 택하면 크루엘라로서의 본성을 억압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둘 중 하나를 택했더라면, 《크루엘라》 전체는 ‘타고난 본성을 교육에 의해 후천적으로 교정할 수 있느냐 없느냐’ 같은 고루한 문제틀 내부로 빨려 들어갔을 것이다. 둘 중 어느 쪽도 아니려는 결단은 그보다도 더 나쁜 선택이라는 사실이야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의 본성과 역사를 한꺼번에 긍정한다. 즉 그녀의 담은 ‘이것이면서 저것이다(oui, oui)’의 배가된 긍정, 강렬한 긍정으로 규정된다. 그녀는 차라리 ‘크루엘라=에스텔라’다.
그렇다고 해서 《크루엘라》가 주인공의 ‘진정한 자아 찾기’ 정도로 일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크루엘라=에스텔라’는 오랜 동지인 재스퍼 및 호레이스와 함께 새로운 가족의 형태를 발명하면서 우정 관념을 갱신하는 동시에 어떤 공동체를 존속시키는 근본 원리를 드러낸다. 이 우정은 형제애(fraternité)로도 자매애(sororité)로도 환원되지 않는 우정이다. 애초에 ‘크루엘라=에스텔라’ 자신은 여성이고 재스퍼와 호레이스는 남성이기도 하거니와, 그냥 어쩌다 보니 길거리에서 만난 그들의 우정은 그 어떤 공통성에도 기반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는 길쭉하고 하나는 뚱뚱하고 하나는 가냘프다. 셋의 우정은 얄팍한 공통성이 아니라 서로 감사함을 교환한 역사의 두께를 통해 존립한다. 공동체를 지탱하는 데 중요한 것은 서로 빚을 지고 있고 신세를 지고 있다는 감각, 즉 부채감이다. 재스퍼와 호레이스가 갖은 수고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요구하는 것은 대단한 무언가가 아니라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이며, 이는 감사하다는 말 자체를 혐오하고 금지시키는 – “Gratitude is for losers.” – 남작 부인과 정확히 대척을 이룬다. 쉽게 말해 나 혼자 잘난 이에게는 친구도 가족도 필요 없고 편할 대로 수족이 되어줄 달마티안이나 필요한 것이다.
자아의 모색과 공동체의 수립은 《크루엘라》의 에이사이드와 비사이드로,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다. 좀 진부한 멘트지만,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바로 이런 나로서 받아들여주는 공동체의 환대와 더불어서만, 거기에 감사를 표하면서만 나는 나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자아의 발견은 결코 내면으로 침잠하는 유폐적인 사무가 아니다. 공동체와 함께 발명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