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해도해도 끝이 없다아아 제발 살려ㅈ ㅜ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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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다정감 아이의 전능감 벌레들 합창단
파리 공연 티켓 예매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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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 Ho Suh: Walk the House at Tate Modern
테이트 모던에서 개최한 서도호 개인전을 혼자 둘러보는 것으로 런던에서의 시간을 마무리했다.
천으로 재구성된 복수의 ‘집’을 한 공간 안에 중첩시키는 서도호의 작업은, 디아스포라적 삶을 살아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낄 만한 것을 품고 있다. 그럼에도 서도호의 작품들이 유독 낯설지 않게 다가오는 건, 그가 오랜 시간 천착해 온 주제들 – ‘집’, ‘공간’, ‘정체성’, ‘이동’ 등 – 에 내가 깊이 공명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정확히 어떤 지점에서 좋았고, 또 어떤 지점에서 의구심이 들었는지에 대해 쓰고 싶은데, 솔직히 아직 잘 모르겠다. 루벤으로 돌아오자마자 시험 기간 모드로 돌입해 버린 나머지 공상할 여유가 딱히 없었다. 그래서 서도호가 아닌 백남준을 통해, ‘집’이 아닌 ‘언어’를 통해 우회적으로나마 감상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1992년 9월, 백남준은 “미디어에 대한 모든 연구는 언어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그가 보고하는 일화는 우리에게 주어진 출발점이 즉시 언어’들’임을 알린다. 일제강점기에 초등학교를 다녔던 백남준은 한국어와 일본어를 수시로 횡단하면서 유년기를 보냈는데, 그런 유년기에 대한 이야기는 “영어로” 쓰여지고 있다. 두 쪽이 채 지나지 않아 세 개의 언어가 교차한다. 그러니까 얼핏 소위 ‘언어적 전회’에 참여할 것처럼 보이는 저 첫 문장을 곧바로 고쳐 읽어야 할 것이다. ‘미디어에 대한 모든 연구는 언어들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를 비롯해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까지 6개 국어를 더듬거릴지언정 할 줄 알았던 백남준에게 이 복수성은 어쩌면 새삼스레 거론할 필요도 없을 만큼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바로 뒤에 이어지는 글 「몇몇 프랑스인(?) 친구들」의 물음표는 우리의 추측을 확증한다. 프랑스인이라는 카테고리는 자신의 프랑스인 친구들을 수식하기에 한참 미진하다. 그들은 그런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처럼 복수성은 그것만으로도 정체성, 동일성, ‘identité’에 대한 우리 사고의 결을 바꾼다.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는 이와 정반대의 장소에서 출발해서 정확히 같은 지점에 도착한다. “저는 하나의 언어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 것이 아닙니다.” 후설 연구자로 학문적 여정을 개시했고 후일 미국 유수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될 데리다는 물론 독어나 영어를 할 줄 알았다. 그런 그가 자기가 할 줄 아는 유일한 언어인 프랑스어가 자기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재학 중이던 알제(Alger)의 중학교에 프랑스 “본토” 출신의 교사가 부임했을 때의 놀라움과 연결되어 있다. 그 교사의 불어는 자신의 것과 같은 불어였지만 같은 불어가 아니었고, 여태 자신이 자신의 언어라고 생각했던 무언가가 실은 타자의 언어였음을 데리다는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언어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는 체험을 데리다는 보편적인 것으로 올려세우고자 한다.
데리다가 자신의 불어를 표준적이고 순수한 것으로 표백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은 잘 알려져 있다. 그렇게 표백하고 난 뒤 즉시 ‘오염’의 사유를 향해 질주했다는 것 역시 잘 알려져 있다. 데리다는 후일 『타자의 단일언어』로 출간된 한 강연에서 회고한다. “제대로 된 프랑스어로 말하기, 순수한 프랑스어로 말하기. … 이런 과장법(‘프랑스인보다 더 프랑스적으로’, 더 ‘순수하게 프랑스적으로’ … 나 자신이 언제나 순수성과 순수화 일반을 비판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과도하고 충동적인 극단주의를 물론 나는 학교에서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강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투리의] 억양은 공적 발화의 지성적인 위엄과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시적 발화가 지닌 자질과는 더욱 안 어울린다. … 억양은 언어 일반과 어떤 육탄전을 벌인다. 그것은 강세를 두는 것보다 더 많이 말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바벨탑보다 더 시원적인 사태다. 독일어, 일본어, 영어처럼 여러 언어들이 갈라지기 이전에 하나의 언어가 이미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 공적, 시적, 표준적, … 그리고 그 대당들. 그래서 어떤 의미로는 도대체 “하나의” 언어라는 게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누군가가 그걸 전유할 수도 없다. 안이하게 어떤 언어가 ‘자기의’ 언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의미다. (‘집’에 대해서도 동일한 통찰이 유효하지 않을까? 그리고 전시를 보는 내내 느꼈던 묘한 위화감은 서도호의 작품들이 복수의 집’들’을 이야기하는 한편, 개개의 집 또한 항상 이미 여러 개의 집들로 갈라진다는 사실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 했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언어에 대한 연구로서 미디어에 대한 연구는 이 다수성과 그에서 연유하는 전유 불가능성에 대한 연구로 귀착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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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무더운 여름, 그리-고 쓸쓸한 가을, 차가-웠던 겨울을 지나, 같이 걷네 🎵
퍽이나 오랜만입니다… 또 소생 심장 요동치게 하는 무언가를 들고 오셨군요… 얼른 시험 공부해야 되는데… 침대 속에 파묻혀서 주구장창 듣게 생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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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tty Sark
아빠랑 함께 여행하면서, 혼자였더라면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곳들을 찾아갔다. 우려했던 대로 질색한 관광지(가령 버킹엄 궁전)가 대부분이었지만 뜻밖에도 흥미롭게 둘러본 곳들이 있었다. 템즈강 유람선을 타고 들른 커티삭호(Cutty Sark)는 그런 예외 중 하나였다.
그리니치 부두 한켠에 영구 정박되어 있는 커티삭 호는 영국의 쾌속범선이었다. 1869년에 주조된 이 범선은 당시 중국에서 영국으로 차를 운반해오던 가장 빠른 범선 중 하나였다고 한다. ‘커티삭(Cutty Sark)’이라는 이름은 스코틀랜드어로 짧은 치마를 뜻하며, 시인 로버트 번스의 시 「Tam o’ Shanter」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라고도 하는데, 이게 커티삭호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그리고 유명세로 치면 범선을 앞질러도 한참 앞지른 블렌디드 위스키 ‘커티삭’과 어떻게 엮이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아빠는 선박의 구조와 속도에 넋이 나간 와중에 이 배를 둘러싼 대영제국의 해양 패권사를 내게 숨 돌릴 틈 없이 퍼부었고, 나는 멀찍이 하루키에 대한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소설 1Q84에서 아오마메는 커티삭하이볼을 주문하는 남자를 원나잇스탠드의 상대로 선택하고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 같은 술을 시킨다. 싱글 몰트 따위 가려서 마시는 짐짓 까다로운 듯한 사람은 침대에서 그저그렇다는 게 아오마메의 지혜로운 의견이다.
가끔은 커티삭처럼 개성 없고 마일드한 술이 너무 좋다. 술에 물탄 듯, 물에 술 탄듯 하이볼로 마시면 천천히, 오래, 많이 마실 수 있고… 그러고 보니 ‘천천히. 오래. 많이.’가 아오마메가 원하는 밤의 모습이었을 수ㄷ…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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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endronach 18 Year Allardice
하루종일 하이랜드 지역을 빼곡히 여행하느라 기운이 바닥난 상태다.
예상대로 어딜가나 안개가 자욱했고, 예상치 못하게 자욱한 안개는 별다른 신비로움을 주지 못했다. 글렌코(Glencoe)와 글렌피난(Glenfinnan)을 둘러보는 내내 ‘날씨가 맑았더라면 나무로 빽빽하게 우거진 숲 풍경이 더 광활하고 풍부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었다. (아니면 차라리 폭풍우 휘몰아치는 풍경 한 가운데서 터벅터벅 걷는 경험을 원했던 걸 수도 있겠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에는 글렌코 학살에 대해 검색해 보느라 여념 없었고, 우려와는 달리 멀미 하지 않았다. 달위니(Dalwhinnie) 증류소를 그냥 지나쳤을 때는 마음이 무척 쓰라렸다.
하여, 오늘도 어쩔 수 없이 쓰라린 상처를 알코올로 소독해야만 한다.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고연산 위스키에는 별로 눈길을 주지 않는다. 터무니없이 비싸기도 하고 동종의 고연산을 마실 바엔 다른 라벨이나 캐스크를 마셔보자 주의다. 물론 맥켈란 25년 같은 건 정말 훌륭하다. 첫 경험에서 나도 모르게 이건 술이 아니라 약이라는 생각이 튀어나왔을 정도였다. 30년산보다 시트러스와 밀향이 짙은 발렌타인 21년도 아주 좋아하긴 한다. 오늘 처음 접한 글렌드로낙 18년 알라디스 셰리캐스트도 게임체인져였다. 비싸서 고심 끝에 반 잔 주문해서 마셨다. 발베니 15년 셰리캐스크가 요즘 기근이기도 해서 가물가물해진 셰리캐스크의 향과 맛을 환기시킬 겸, 상처도 소독할 겸… 겸사겸사.
바디감과 셰리의 풍미가 방종하리만치 풍부하다. 버터크림, 퍼지, 건포도, 초콜릿, 졸인 설탕, 아몬드. 아마 바디용품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아실 텐데, 날씨가 선선해지면 생각나는 시어버터나 코코넛오일이 듬뿍 들어간 리치한 바디크림 같은 달콤고소함이 바로 여기 있다. 보통 드로낙은 향이 복잡하다고 많이들 설명하는 것 같은데 내가 느끼기에는 밸런스가 좋아서인지 관능적이고도 단순하다. 과일도 있지만, 캐러멜과 함께 오랜 시간 졸이거나 초콜릿으로 코팅된 과일이다. 여기에 꽤 우디한 라스트 노트가 아주 오랫동안 뒤따른다. 라프로익 트리플우드의 우디함과 비교하자면, 트리풀우드의 우디함이 빳빳한 고재의 요철에서 흘러나오는 우디함이라면, 드로낙의 우디함은 늘상 호두 기름을 먹이고 관리에 공을 들여 표면이 반질반질한 나무에서 날 듯한 우디함 같다. 비단결, 간결체의 흠 잡을 데 없는 한 편의 수필, 솔기 없이 무봉으로 마감한 캐시미어 제품 따위를 연상하게 된다. 충분히 값을 하는 술이지만 언제나 그렇듯 비싸서 쉬이 추천하진 못할 것 같다. (추천이고 나발이고 우선 나도 이번 드램이 처음이자 마지막 한 모금일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다. 대학원생 주머니 사정이야 뭐 늘상 그런 것이고, 18년 알라디스는 아쉽게도 이미 단종된 상태다.) 부디 취했을 때 마시지만 않으면 된다. 그러기엔 너무 아까운 드램이다. 이 술 덕에 귀갓길 발걸음이 가볍고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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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en Allachie 10 Year Old Cask Strength Batch 7
선선하고 우중충한 에든버러에 도착했다. 간만에 호젓한 날씨가 반가운 밤이다. 엄마는 기차역에 도착하자마자 앞으로 피서는 스코틀랜드로 와야겠다고 중얼거렸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와 사촌누나랑 스코틀랜드 일정을 계획하면서 위스키 증류소 방문은 자연스럽게 나중으로 미뤄졌다. 대부분의 디스틸러리들의 접근성이 안 좋을 뿐더러 셋 중에서 증류소를 찾을 정도로 위스키를 좋아하는 사람은 나 밖에 없으니 그저 모든 것이 순리대로 흘러간 것 뿐이다. 애초에 특별한 기대 없이 왔는지라 실망할 여지는 딱히 없지만서두, 구글 지도를 통해 내일 방문할 하이랜드의 글렌코(Glencoe)로부터 오반(Oban) 디스틸러리가 얼마나 가까운지 너무나도 직관적으로 확인해버렸기에 하루종일 위스키 생각이 머리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해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바에서 제일 먼저 보이는 글렌알라키 10년을 주문해서 홀짝했다.
글렌알라키는 역시 셰리캐스크의 신흥 강자임을 확인했다. 대다수의 스카치하우스의 역사가 한 세기를 훌쩍 넘어가는 게 예사이니 1960년대 설립된 글렌알라키는 아주 젊은 축에 속한다. 셰리 캐스크를 좋아하는 단골 바 사장님이 추천해줬던 12년산도 좋아서 여러번 마셨는데 10년 cs 배치 7번 역시 듣던대로 아주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오로로소(oloroso), px 펀천(puncheon) 숙성. (얼핏 찾아보니 ‘펀천’은 500리터 이상의 캐스크를 지칭하는 듯 하다. 배럴이나 캐스크가 아닌 굳이 펀천이라 표현한 데 이유가 있을 듯 하지만 확인이 필요하다.)
초콜릿, 육두구. 약간 콩 같은 뉘앙스가 있는데 커피 같기도 하고 풋콩 같기도 하다. 셰리 캐스크에서 흔한 프루티함은 약한 편이다. 좀 더 중후하고 스파이시한 와중에 오렌지 껍질, 나무 껍질의 흔적도 느껴진다. CS 56.8도지만 무리 없이 넘어간다. 이런 계절에는 온더락으로도 괜찮을 거 같다.
셰리 캐스크가 바닥이 났다, 요즘 생산되는 스카치는 옛날만치 터프하지 못하다, 00는 단종될 것 같다… 등 스카치에 관한 소문이 무성한 가운데 지속되는 고물가,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물류문제까지 겹쳐 이 시장은 약 3-4년째 흉흉하다. 그래서 어느때보다도 올드보틀에 대한 환상이 무럭무럭 자라고, 나로선 평소 잘 마시지 않던 맥켈란이 마시고 싶어지기도 하고… 하지만 아란, 글렌알라키 같은 젊은 증류소가 생산하는 이런 위스키를 경험하니 어느 분야나 그렇듯 이 시장에도 소장파격의 생산자가 생겨나고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으니 전통과 과거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겠거니 한다. (글렌알라키 라벨의 ‘고인돌 가족’스러운 폰트는 앞으로도 도무지 긍정할 수 없을 거 같다. 새로 디자인한 라벨도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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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것들은 아름답고 숭고한 것으로 변형될 수 있습니다.”
김현은 문학이 무용해서 유용하다고 썼다.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 문학은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으로 만들고, 그래서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기만을 날카롭게 고발한다.” 이제나 저제나 감동적인 글이지만, 의문이 있다. 무용하다면, 그냥 무용한 것 아닐까? 거기 붙는 모든 변호는 그것의 무용성을 재차 승인할 뿐인 것 아닐까? 문학이 아니라도 우리는 인간의 기만성을 얼마든지 고발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유독 문학이 그런 고발을 더 효과적으로 수행하는가? 잘 모르겠다.
예전에는 U2를 좋아하는 인종차별주의자 같은 것이 가능하지 않으리라고 믿었지만, 요즘 생각기로는 미문(美文)은 민주주의는 물론이고 평등이니 정의니 하는 커다란 가치와 본질적 연관관계를 가지지 않는 것 같다. 오스카 와일드는 단언한다. “예술은 모두 쓸모없는 것이다.” 비단 문학에만 적용되는 혐의는 아니겠지만, 문필가의 삶은 종종 자기 작품의 위대함을 배반한다. 미당 전집 발간에 즈음하여 있었던 논쟁은 둘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의 문제일 터이다. 그런데 문학적 위대함이 구체적 부정의를 무화시킬 수 없듯 구체적 부정의도 문학적 위대함을 말소할 수 없다면, 사실 양자는 원래부터 별 상관없었던 것 아닐까? 아름다운 것은 부정의하게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다. 당대의 통념을 배신하면서 스캔들이 되는 아름다움은 그런 부정의한 아름다움의 작은 아종에 불과하다.
때때로 예술은 지나치게 안전한 것이어서 일부러 문제를 일으키는 것처럼도 보인다. 1974년,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리듬 0>라는 표제 아래 여섯 시간 동안 스스로의 신체를 대상화하여 전시했다. 그녀는 탁자 위에 72가지의 “쾌락의 도구”와 “파괴의 도구”를 두고 관객들로 하여금 그녀에게 그것을 사용하도록 초대하며, “기획 중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지겠다고 했다. 뒷이야기는 뻔하다. 그녀는 거친 손길의 대상이 되었다. 관객들은 키스하고 애무하고 옷을 찢고 살을 베고 피를 빨고 머리에 권총을 겨눴다. 그녀는 이 기획이 “우리 내부에 숨어있는 잔혹한 인간성을 폭로”했다고 자평하며, “기회만 주어지면 대부분의 ‘정상적’인 관중은 폭도로 변하고 만도”고 이야기했다. 이 기획 자체의 흥미로움과는 별개로 그런 평은 조금 미련한 게 아닌가 싶다. 인간의 잔혹함은 새삼스러운 폭로를 필요로 하기에는 너무 오래된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인간은 그럴 만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응당 그렇게 행동한다. 관건은 그런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교류 체계를 구축하는 데에, 그 구축 가능성을 암시하는 데에 있다. 일부러 그런 기회를 제공하면서 인간을 시험해보는 것이야말로 악취미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예술이 세상을 구할 수도 바꿀 수도 없다고 말하면서, 자기 활동의 궁극적 무의미함을 개개인이 연약함으로 이어지는 연대 가능성을 통해 보충하려 한다. “세상은 각성된 개인이 모두 실천할 때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예술은 세상이 나아갈 길은 보여줄 수 있어요. 하지만 의식의 변화는 개인이 이루는 겁니다. […] 개인 각자는 평범한 대중이 아닙니다. 이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이고, 저는 그들과 연결되어 머무는 겁니다. 모마 퍼포먼스에서 중요했던 건 아주 약한 존재로 제가 마음을 열고 있었다는 것인데, 우리 개개인은 그렇게 연약함을 드러내며 연대를 이뤄나갈 수 있습니다.” 그녀는 가장 개인적인 순간의 보편성을 주장하며 연약한 고독으로써 연대하기를 추구한다. 이는 미학적 개인주의의 전형이다. 그러나 밀실에서 인간이 하는 짓이란 대개 음험하지 않은가? 아브라모비치의 작품을 그녀 자신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 바로 그 연약한 개인들이 각자 또 평범한 대중이자 잔인한 폭도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실은 개인이라는 관념도 우중이라는 관념도 모두 지나치게 신화화됐다. 아닌 게 아니라 누군가는 <리듬 0>를 두고 ‘인간은 내면의 야수성을 지나치게 억압받고 있다’고도 짐짓 평할 수 있다. 물론 그런 억압이라면 무척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혹은 적어도, 그런 야수적 역량을 어떤 식으로든 소화시켜낼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특정한 관념을 신비화하고 불가해로써 곧장 정당화해버리는 태도다.
“살인의 충동은 결코 제거되지 않을 겁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동물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동물로서 인간은 잔인해질 능력을 갖고 있고, 타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 쾌락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이건 근절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다만 이것이 우리가 살인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환원 불가능한 이 충동을 조절하는 것이 철학과 사유의 결정적인 기능 중 하나입니다. 잔인함과 공격성은 항상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아름답고 숭고한 것으로 변형될 수 있습니다. 내가 글을 쓸 때, 글을 쓴다는 행위에는 공격성의 요소가 들어 있지만, [동시에] 그 행위는 공격성을 어떤 유용한 것으로 변형시키고자 애쓰는 것이지요. 공격성은 살인보다 더 흥미로운 것으로 변형될 수 있습니다.” (Jacques Derri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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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ver Monk (은빛 수도사)
파리 여행 내내 아이스티를 벌컥벌컥 들이킨 후 잔에 남은 조각 얼음까지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을 정도의 맹더위를 견뎌내면서도, 막상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늦가을에나 어울리는 샤르트뢰즈를 마셨다. 게다가 평소 같으면 그린 샤르트뢰즈를 홀짝였을텐데, 기묘하게도 이번에는 옐로우 샤르트뢰즈가 들어간 Silver Monk를 식후주로 자주 마셨다.
Silver Monk는 통상적으로 데킬라, 옐로우 샤르트뢰즈, 오이, 민트, 약간의 소금과 시럽, 라임주스로 만든다. ‘Monk’가 들어가는 이름의 칵테일에는 당연히 수도회와 연관된 재료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샤르트뢰즈는 프랑스의 카르투시안 수도회에서 약 17세기부터 내려오는 레시피로 만들었다고 한다. 대체로 허벌 리큐르들은 약용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지나 경험상 이런 얘기는 한 반 정도만 믿으면 될 거 같다. 그랬다손 쳐도 약용보단 점차 수도사들의 길고 고된 수도 생활의 몇 안되는 벗 같은 게 되지 않았을까? 한 잔 마시면서 책도 파고 행성도 관찰하고 종이접기도 하고… 감자 캐다가 소맷자락에 숨겨놓은 걸 홀짝하기도 하고… 누구나 유희와 노동의 벗이 필요한 법이다.
100가지 이상의 허브가 들어가고, 이 계열이 늘 그렇듯 레시피는 비밀이다. (근데 또 막 안달 날 정도로 궁금하진 않다.)
오컬트물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서 어렸을 적엔 ‘수도회’자가 들어가면 마냥 무섭고 신비롭게만 느껴졌지만 이제는 별 감흥 없이 읽는다. 제정분리가 안 되어있고 복지가 전무했던 시절 이 같은 종교시설이 행했던 커뮤니티 내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면 오랜 리큐르의 탄생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필연적으로 다가온다. 아마도 수도사들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분쟁을 중재하고 윤리 기준을 지도하고, 오늘날로 따지면 복지사각지대에 놓인 주민을 보살피고, 때로 약국, 의원, 정신과 상담의의 역할까지 (야매로)맡았을 거로 추정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영적’ 지도는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와중 약용의 뭔가를 개발하는 건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 않았을까? 아스피린이나 훼스탈 같은 게 없던 시절이니 감기든 심장병이든 급체든 하나로 퉁쳐서 수면연장이니 자양강장이니 하는 종합 치료제격의 약이 필요했을 것이고, 아무리 종교단체라 해도 자급할 수 있는 품목은 한정되었을테니 벌이의 수단의 면에서도 그랬을 터이다.
아무튼, 이름에 이끌려 주문한 후 실버몽크의 레시피를 검색해봤을 때 맛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데킬라, 샤르트뢰즈의 조합도 상당히 생소한데, 거기에 오이, 소금, 민트라니. 반신반의했는데 조합은 훌륭하다. 자기 주장 강한 재료들이 다 살아있는 한편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도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촘촘한 느낌이다. 짙은 허벌한 풍미나 오이에 거부감이 없다면 충분히 반가워할 맛이다. 데킬라와 라임의 톡 쏘는 스파이시함, 오이의 시원함, 미세한 짭쪼름함, 약초향의 층이 흥미롭다.
은빛 수도사. 엄숙하고 자애로운 수도사보다는 초로의, 코가 빨갛고, 익살맞고, 조금 굼뜨고, 껄렁한 농담을 일삼고, 술 좋아하는 그런 동네 아재 같은 이를 상상해본다. 가니시는 타임이나 오이가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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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this loud enough
6:23 PM. Back in the Eurostar lounge which is now my virtual reality. World’s most interesting man complaining to someone about the absence of seat recline buttons on his last Deutsche Bahn train from Frankfurt, but also excited to report that he had steak with carrots because “you can’t really mess up steak.”
6:27 PM. Things would be so much better if everyone pronounced “tariff” like Omar “Sharif”.
6:40 PM. Seat number 1 in carriage 2. Not sure how I feel about this. Don’t totally feel like a winner.
6:59 PM. Yikes everything was great until the Kissinger reference
7:26 PM. Had the good fortune of having the world’s loudest man sit next to me. Seems like his business is in trouble but his associate will be calling clients ASAP. Hoping it all works out.
7:34 PM. What is a father?
7:35 PM. Turns out the world’s loudest people are holding a convention in the Eurostar lounge. Finest loud people from all over the world speaking loudly to each other & their phon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