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휴 써야지 뭐 어떡해

  • Glendronach 18 Year Allardice

    하루종일 하이랜드 지역을 빼곡히 여행하느라 기운이 바닥난 상태다.

    예상대로 어딜가나 안개가 자욱했고, 예상치 못하게 자욱한 안개는 별다른 신비로움을 주지 못했다. 글렌코(Glencoe)와 글렌피난(Glenfinnan)을 둘러보는 내내 ‘날씨가 맑았더라면 나무로 빽빽하게 우거진 숲 풍경이 더 광활하고 풍부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었다. (아니면 차라리 폭풍우 휘몰아치는 풍경 한 가운데서 터벅터벅 걷는 경험을 원했던 걸 수도 있겠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에는 글렌코 학살에 대해 검색해 보느라 여념 없었고, 우려와는 달리 멀미 하지 않았다. 달위니(Dalwhinnie) 증류소를 그냥 지나쳤을 때는 마음이 무척 쓰라렸다.

    하여, 오늘도 어쩔 수 없이 쓰라린 상처를 알코올로 소독해야만 한다.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고연산 위스키에는 별로 눈길을 주지 않는다. 터무니없이 비싸기도 하고 동종의 고연산을 마실 바엔 다른 라벨이나 캐스크를 마셔보자 주의다. 물론 맥켈란 25년 같은 건 정말 훌륭하다. 첫 경험에서 나도 모르게 이건 술이 아니라 약이라는 생각이 튀어나왔을 정도였다. 30년산보다 시트러스와 밀향이 짙은 발렌타인 21년도 아주 좋아하긴 한다. 오늘 처음 접한 글렌드로낙 18년 알라디스 셰리캐스트도 게임체인져였다. 비싸서 고심 끝에 반 잔 주문해서 마셨다. 발베니 15년 셰리캐스크가 요즘 기근이기도 해서 가물가물해진 셰리캐스크의 향과 맛을 환기시킬 겸, 상처도 소독할 겸… 겸사겸사.

    바디감과 셰리의 풍미가 방종하리만치 풍부하다. 버터크림, 퍼지, 건포도, 초콜릿, 졸인 설탕, 아몬드. 아마 바디용품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아실 텐데, 날씨가 선선해지면 생각나는 시어버터나 코코넛오일이 듬뿍 들어간 리치한 바디크림 같은 달콤고소함이 바로 여기 있다. 보통 드로낙은 향이 복잡하다고 많이들 설명하는 것 같은데 내가 느끼기에는 밸런스가 좋아서인지 관능적이고도 단순하다. 과일도 있지만, 캐러멜과 함께 오랜 시간 졸이거나 초콜릿으로 코팅된 과일이다. 여기에 꽤 우디한 라스트 노트가 아주 오랫동안 뒤따른다. 라프로익 트리플우드의 우디함과 비교하자면, 트리풀우드의 우디함이 빳빳한 고재의 요철에서 흘러나오는 우디함이라면, 드로낙의 우디함은 늘상 호두 기름을 먹이고 관리에 공을 들여 표면이 반질반질한 나무에서 날 듯한 우디함 같다. 비단결, 간결체의 흠 잡을 데 없는 한 편의 수필, 솔기 없이 무봉으로 마감한 캐시미어 제품 따위를 연상하게 된다. 충분히 값을 하는 술이지만 언제나 그렇듯 비싸서 쉬이 추천하진 못할 것 같다. (추천이고 나발이고 우선 나도 이번 드램이 처음이자 마지막 한 모금일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다. 대학원생 주머니 사정이야 뭐 늘상 그런 것이고, 18년 알라디스는 아쉽게도 이미 단종된 상태다.) 부디 취했을 때 마시지만 않으면 된다. 그러기엔 너무 아까운 드램이다. 이 술 덕에 귀갓길 발걸음이 가볍고 즐거웠다.

  • Glen Allachie 10 Year Old Cask Strength Batch 7

    선선하고 우중충한 에든버러에 도착했다. 간만에 호젓한 날씨가 반가운 밤이다. 엄마는 기차역에 도착하자마자 앞으로 피서는 스코틀랜드로 와야겠다고 중얼거렸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와 사촌누나랑 스코틀랜드 일정을 계획하면서 위스키 증류소 방문은 자연스럽게 나중으로 미뤄졌다. 대부분의 디스틸러리들의 접근성이 안 좋을 뿐더러 셋 중에서 증류소를 찾을 정도로 위스키를 좋아하는 사람은 나 밖에 없으니 그저 모든 것이 순리대로 흘러간 것 뿐이다. 애초에 특별한 기대 없이 왔는지라 실망할 여지는 딱히 없지만서두, 구글 지도를 통해 내일 방문할 하이랜드의 글렌코(Glencoe)로부터 오반(Oban) 디스틸러리가 얼마나 가까운지 너무나도 직관적으로 확인해버렸기에 하루종일 위스키 생각이 머리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해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바에서 제일 먼저 보이는 글렌알라키 10년을 주문해서 홀짝했다.

    글렌알라키는 역시 셰리캐스크의 신흥 강자임을 확인했다. 대다수의 스카치하우스의 역사가 한 세기를 훌쩍 넘어가는 게 예사이니 1960년대 설립된 글렌알라키는 아주 젊은 축에 속한다. 셰리 캐스크를 좋아하는 단골 바 사장님이 추천해줬던 12년산도 좋아서 여러번 마셨는데 10년 cs 배치 7번 역시 듣던대로 아주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오로로소(oloroso), px 펀천(puncheon) 숙성. (얼핏 찾아보니 ‘펀천’은 500리터 이상의 캐스크를 지칭하는 듯 하다. 배럴이나 캐스크가 아닌 굳이 펀천이라 표현한 데 이유가 있을 듯 하지만 확인이 필요하다.)

    초콜릿, 육두구. 약간 콩 같은 뉘앙스가 있는데 커피 같기도 하고 풋콩 같기도 하다. 셰리 캐스크에서 흔한 프루티함은 약한 편이다. 좀 더 중후하고 스파이시한 와중에 오렌지 껍질, 나무 껍질의 흔적도 느껴진다. CS 56.8도지만 무리 없이 넘어간다. 이런 계절에는 온더락으로도 괜찮을 거 같다.

    셰리 캐스크가 바닥이 났다, 요즘 생산되는 스카치는 옛날만치 터프하지 못하다, 00는 단종될 것 같다… 등 스카치에 관한 소문이 무성한 가운데 지속되는 고물가,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물류문제까지 겹쳐 이 시장은 약 3-4년째 흉흉하다. 그래서 어느때보다도 올드보틀에 대한 환상이 무럭무럭 자라고, 나로선 평소 잘 마시지 않던 맥켈란이 마시고 싶어지기도 하고… 하지만 아란, 글렌알라키 같은 젊은 증류소가 생산하는 이런 위스키를 경험하니 어느 분야나 그렇듯 이 시장에도 소장파격의 생산자가 생겨나고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으니 전통과 과거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겠거니 한다. (글렌알라키 라벨의 ‘고인돌 가족’스러운 폰트는 앞으로도 도무지 긍정할 수 없을 거 같다. 새로 디자인한 라벨도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 “하지만 그것들은 아름답고 숭고한 것으로 변형될 수 있습니다.”

    김현은 문학이 무용해서 유용하다고 썼다.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 문학은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으로 만들고, 그래서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기만을 날카롭게 고발한다.” 이제나 저제나 감동적인 글이지만, 의문이 있다. 무용하다면, 그냥 무용한 것 아닐까? 거기 붙는 모든 변호는 그것의 무용성을 재차 승인할 뿐인 것 아닐까? 문학이 아니라도 우리는 인간의 기만성을 얼마든지 고발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유독 문학이 그런 고발을 더 효과적으로 수행하는가? 잘 모르겠다.

    예전에는 U2를 좋아하는 인종차별주의자 같은 것이 가능하지 않으리라고 믿었지만, 요즘 생각기로는 미문(美文)은 민주주의는 물론이고 평등이니 정의니 하는 커다란 가치와 본질적 연관관계를 가지지 않는 것 같다. 오스카 와일드는 단언한다. “예술은 모두 쓸모없는 것이다.” 비단 문학에만 적용되는 혐의는 아니겠지만, 문필가의 삶은 종종 자기 작품의 위대함을 배반한다. 미당 전집 발간에 즈음하여 있었던 논쟁은 둘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의 문제일 터이다. 그런데 문학적 위대함이 구체적 부정의를 무화시킬 수 없듯 구체적 부정의도 문학적 위대함을 말소할 수 없다면, 사실 양자는 원래부터 별 상관없었던 것 아닐까? 아름다운 것은 부정의하게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다. 당대의 통념을 배신하면서 스캔들이 되는 아름다움은 그런 부정의한 아름다움의 작은 아종에 불과하다.

    때때로 예술은 지나치게 안전한 것이어서 일부러 문제를 일으키는 것처럼도 보인다. 1974년,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리듬 0>라는 표제 아래 여섯 시간 동안 스스로의 신체를 대상화하여 전시했다. 그녀는 탁자 위에 72가지의 “쾌락의 도구”와 “파괴의 도구”를 두고 관객들로 하여금 그녀에게 그것을 사용하도록 초대하며, “기획 중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지겠다고 했다. 뒷이야기는 뻔하다. 그녀는 거친 손길의 대상이 되었다. 관객들은 키스하고 애무하고 옷을 찢고 살을 베고 피를 빨고 머리에 권총을 겨눴다. 그녀는 이 기획이 “우리 내부에 숨어있는 잔혹한 인간성을 폭로”했다고 자평하며, “기회만 주어지면 대부분의 ‘정상적’인 관중은 폭도로 변하고 만도”고 이야기했다. 이 기획 자체의 흥미로움과는 별개로 그런 평은 조금 미련한 게 아닌가 싶다. 인간의 잔혹함은 새삼스러운 폭로를 필요로 하기에는 너무 오래된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인간은 그럴 만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응당 그렇게 행동한다. 관건은 그런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교류 체계를 구축하는 데에, 그 구축 가능성을 암시하는 데에 있다. 일부러 그런 기회를 제공하면서 인간을 시험해보는 것이야말로 악취미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예술이 세상을 구할 수도 바꿀 수도 없다고 말하면서, 자기 활동의 궁극적 무의미함을 개개인이 연약함으로 이어지는 연대 가능성을 통해 보충하려 한다. “세상은 각성된 개인이 모두 실천할 때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예술은 세상이 나아갈 길은 보여줄 수 있어요. 하지만 의식의 변화는 개인이 이루는 겁니다. […] 개인 각자는 평범한 대중이 아닙니다. 이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이고, 저는 그들과 연결되어 머무는 겁니다. 모마 퍼포먼스에서 중요했던 건 아주 약한 존재로 제가 마음을 열고 있었다는 것인데, 우리 개개인은 그렇게 연약함을 드러내며 연대를 이뤄나갈 수 있습니다.” 그녀는 가장 개인적인 순간의 보편성을 주장하며 연약한 고독으로써 연대하기를 추구한다. 이는 미학적 개인주의의 전형이다. 그러나 밀실에서 인간이 하는 짓이란 대개 음험하지 않은가? 아브라모비치의 작품을 그녀 자신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 바로 그 연약한 개인들이 각자 또 평범한 대중이자 잔인한 폭도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실은 개인이라는 관념도 우중이라는 관념도 모두 지나치게 신화화됐다. 아닌 게 아니라 누군가는 <리듬 0>를 두고 ‘인간은 내면의 야수성을 지나치게 억압받고 있다’고도 짐짓 평할 수 있다. 물론 그런 억압이라면 무척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혹은 적어도, 그런 야수적 역량을 어떤 식으로든 소화시켜낼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특정한 관념을 신비화하고 불가해로써 곧장 정당화해버리는 태도다.

    “살인의 충동은 결코 제거되지 않을 겁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동물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동물로서 인간은 잔인해질 능력을 갖고 있고, 타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 쾌락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이건 근절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다만 이것이 우리가 살인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환원 불가능한 이 충동을 조절하는 것이 철학과 사유의 결정적인 기능 중 하나입니다. 잔인함과 공격성은 항상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아름답고 숭고한 것으로 변형될 수 있습니다. 내가 글을 쓸 때, 글을 쓴다는 행위에는 공격성의 요소가 들어 있지만, [동시에] 그 행위는 공격성을 어떤 유용한 것으로 변형시키고자 애쓰는 것이지요. 공격성은 살인보다 더 흥미로운 것으로 변형될 수 있습니다.” (Jacques Derrida)

  • Silver Monk (은빛 수도사)

    파리 여행 내내 아이스티를 벌컥벌컥 들이킨 후 잔에 남은 조각 얼음까지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을 정도의 맹더위를 견뎌내면서도, 막상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늦가을에나 어울리는 샤르트뢰즈를 마셨다. 게다가 평소 같으면 그린 샤르트뢰즈를 홀짝였을텐데, 기묘하게도 이번에는 옐로우 샤르트뢰즈가 들어간 Silver Monk를 식후주로 자주 마셨다.

    Silver Monk는 통상적으로 데킬라, 옐로우 샤르트뢰즈, 오이, 민트, 약간의 소금과 시럽, 라임주스로 만든다. ‘Monk’가 들어가는 이름의 칵테일에는 당연히 수도회와 연관된 재료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샤르트뢰즈는 프랑스의 카르투시안 수도회에서 약 17세기부터 내려오는 레시피로 만들었다고 한다. 대체로 허벌 리큐르들은 약용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지나 경험상 이런 얘기는 한 반 정도만 믿으면 될 거 같다. 그랬다손 쳐도 약용보단 점차 수도사들의 길고 고된 수도 생활의 몇 안되는 벗 같은 게 되지 않았을까? 한 잔 마시면서 책도 파고 행성도 관찰하고 종이접기도 하고… 감자 캐다가 소맷자락에 숨겨놓은 걸 홀짝하기도 하고… 누구나 유희와 노동의 벗이 필요한 법이다.

    100가지 이상의 허브가 들어가고, 이 계열이 늘 그렇듯 레시피는 비밀이다. (근데 또 막 안달 날 정도로 궁금하진 않다.)

    오컬트물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서 어렸을 적엔 ‘수도회’자가 들어가면 마냥 무섭고 신비롭게만 느껴졌지만 이제는 별 감흥 없이 읽는다. 제정분리가 안 되어있고 복지가 전무했던 시절 이 같은 종교시설이 행했던 커뮤니티 내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면 오랜 리큐르의 탄생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필연적으로 다가온다. 아마도 수도사들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분쟁을 중재하고 윤리 기준을 지도하고, 오늘날로 따지면 복지사각지대에 놓인 주민을 보살피고, 때로 약국, 의원, 정신과 상담의의 역할까지 (야매로)맡았을 거로 추정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영적’ 지도는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와중 약용의 뭔가를 개발하는 건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 않았을까? 아스피린이나 훼스탈 같은 게 없던 시절이니 감기든 심장병이든 급체든 하나로 퉁쳐서 수면연장이니 자양강장이니 하는 종합 치료제격의 약이 필요했을 것이고, 아무리 종교단체라 해도 자급할 수 있는 품목은 한정되었을테니 벌이의 수단의 면에서도 그랬을 터이다.

    아무튼, 이름에 이끌려 주문한 후 실버몽크의 레시피를 검색해봤을 때 맛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데킬라, 샤르트뢰즈의 조합도 상당히 생소한데, 거기에 오이, 소금, 민트라니. 반신반의했는데 조합은 훌륭하다. 자기 주장 강한 재료들이 다 살아있는 한편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도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촘촘한 느낌이다. 짙은 허벌한 풍미나 오이에 거부감이 없다면 충분히 반가워할 맛이다. 데킬라와 라임의 톡 쏘는 스파이시함, 오이의 시원함, 미세한 짭쪼름함, 약초향의 층이 흥미롭다.

    은빛 수도사. 엄숙하고 자애로운 수도사보다는 초로의, 코가 빨갛고, 익살맞고, 조금 굼뜨고, 껄렁한 농담을 일삼고, 술 좋아하는 그런 동네 아재 같은 이를 상상해본다. 가니시는 타임이나 오이가 좋을 듯 하다.

  • is this loud enough

    6:23 PM. Back in the Eurostar lounge which is now my virtual reality. World’s most interesting man complaining to someone about the absence of seat recline buttons on his last Deutsche Bahn train from Frankfurt, but also excited to report that he had steak with carrots because “you can’t really mess up steak.”

    6:27 PM. Things would be so much better if everyone pronounced “tariff” like Omar “Sharif”.

    6:40 PM. Seat number 1 in carriage 2. Not sure how I feel about this. Don’t totally feel like a winner.

    6:59 PM. Yikes everything was great until the Kissinger reference

    7:26 PM. Had the good fortune of having the world’s loudest man sit next to me. Seems like his business is in trouble but his associate will be calling clients ASAP. Hoping it all works out.

    7:34 PM. What is a father?

    7:42 PM. Turns out the world’s loudest people are holding a convention in the Eurostar lounge. Finest loud people from all over the world speaking loudly to each other & their phones.

  • 《나의 부모》

    4월에 파리에서 방문한 David Hockney 25 에서도, 몇일 전 가볍게 둘러 본 테이트 모던에서도 호크니의 《나의 부모》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림의 전시 여부는 미술관 홈페이지에서 손쉽게 확인할 수 있을테지만 그냥 왠지 이 그림은 설렁설렁 둘러보다가 우연(인 것 마냥)히 마주쳤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나의 부모》라는 이름의 이 작품에서 데이비드 호크니는 관찰자를 초대하되 무심하게 초대한다. 이 무심한 초대는 우선 두 개의 인물로 나뉜다: 한편으로는 어머니가 관찰자에게 지긋이 시선을 보내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두꺼운 책을 들여다 보느라 여념이 없다. 그럼에도 어머니의 정제된 다소곳함을 취소하는 것은 아버지의 편안한 흐트러짐이다. 관찰자에게 애정을 주고 있는 것은 어머니인 걸까, 아버지인 걸까? 실은 둘 모두일 것이며, 거기에 나름의 방식이 있을 뿐이다. 조용히 눈길을 끊지 않는 어머니와 ‘어 그래 왔냐’고 툭 던지는 아버지 운운. – 뭐라고 묘사해도 좋겠지만, 이 모든 광경을 다소 비현실적인 것으로, 나아가 이 그림 자체를 뛰어나게 독특한 것으로 만드는 장치는 화폭의 가운데 즈음 비치된 거울이다. 관찰자가 비칠 법한 위치에 놓인 이 거울은 맞은편의 벽면만을 비출 뿐으로, 관찰자의 자리를 ‘적극적으로’ 빈자리로 만들어 버린다. 어머니와 시선을 교환하면서 아버지를 응시하는 자식은 과연 어디에 있는 걸까? 이 자리는 본디 그림을 그리고 있는 호크니 자신의 자리일 것이다. 그러나 이 부모는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진 《나의 부모》다. 그들은 단지 호크니 자신의 부모로 머물지 않고 부모됨의 이상적 ‘이마고’로 승화되어야 한다. 어쩌면 그것이 호크니가 제 부모에게 바칠 수 있는 제일 큰 경의일지도 모른다. 바로 이를 위해 그는 관찰자의, 그러니까 자기 자신의 존재를 삭제해 버리는 게 아닐까? 호크니가 이로써 포기하는 것은 현전적 관찰자로서의 소유권이고 혈육으로서의 상속권이다. 지금 여기서 부모를 직접 보면서 수고롭게 그리고 있는 이 내가 멀리 떠나도, 혹여 죽어 사라져도, 그들은 여전히 나의 부모다. 나아가 이 부모는 단지 나만의 부모인 것조차 아니다. 거울은 아무도 비추고 있지 않다. 그들은 누구의 부모도 아니어서 모두의 부모일 수 있다. 이 그림에 스민 정갈한 온기, 호들갑 없는 따뜻함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어서 모두의 것일 수 있다. 누구나 이 그림 안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갈 수 있다. 아버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어머니의 백발을 쓰다듬고, 거울 옆의 화병 내음을 맡고… 그리고 거울을 들여다 보면, 거기 모든 자식이 있다.

    *잘 보면 수납장 하단에 샤르댕 화집이 놓여 있다. 과문하지만, 내 식대로 요약하자면 샤르댕은 정물을 실로 정물로서 해방시킨 화가다. 샤르댕과 함께 정물은 더이상 무언가의 은유가 아닌, ‘그냥 단순한’ 정물이 되었다. 이 그림에 하필 샤르댕의 이름을 기입해뒀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해독을 요구한다. 이는 호크니의 재치다. 그는 제 부모를 정물still life, nature morte로서 여기 붙들어 두려고 한게 아닐까? ‘정물’로서의 ‘초상’인 셈이다.

    **거울 안에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세례 그림이 비치는 것 또한 재미있다. 샤르댕에 비추어(혹은 구도의 면에서는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의 천장을 장식하는 샹들리에에 켜진 촛불과도 연결시킬 수도 있을듯 하다) 더욱 풍부한 해석이야 여러가지로 가능할 것 같다만… 그냥 그림이 너무 좋아서 멋도 모르면서 막 쓴다. 그림에 관한 글 쓸 때마다 떠오르는 미술/미술사 공부하는 몇몇 친구들의 얼굴이 제 초자아십니다… 틀리면 어떡하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치키치키챠카챠카초코초코쵸…

    ***아래 그림이 말하자면 저 그림의 ‘원본’일 것이다. “My Parents and Myself”(1975)가 그냥 “My Parents”(1977)가 되는 이 반복과 감산이 흥미로운 것이다.

  • 무더운 날이었다.

    무더운 날이었다. 습도가 백 퍼센트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건장한 한 청년은 어쨌거나 아랑곳할 도리 없이 붐비는 육교 위에서 헬스장 찌라시를 나눠주고 있었다. 그저 하던 대로 했을 따름이었다. 그때 한 중년 사내가 노여웠는지 버럭 소릴 질렀다. 청년이 눈을 들어보니 그에게는 오른팔이 없었다. 팔도 없는데 어떻게 헬스를 할 수 있겠냐는 말이 욕지거리와 섞여 육교 바닥에 널부러졌다. 청년은 죄송하다며 짐짓 무시하고 넘어가려 했으나 중년은 떠나질 않았다. 청년도 대거리질을 시작했다. 내가 알고 그랬냐는 것이었다. 마침내 사내는 청년이 들고 있던 찌라시를 쳐 흩었다. 청년은 아, 씨발! 소리치고 찌라시를 줍기 시작했다. 사내는 떠났다.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모두가 아팠다. 육교의 철바닥이 뜨거웠다.

  •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요

    암스테르담에서 파리로 넘어온 날, 파리 최고기온이 37도를 가뿐히 웃돌았다. 에펠탑을 이례적인 폭(20cm)으로 변형시킬 만한 불볕더위였다고 한다. 서울에서 루벤으로 건너올 때 한편으로는 일상적인 미식/식도락의 가능성을 애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비교적 무미건조한 여름을 보낼 수 있음을 위안 삼았는데 그건 소박해도 너무 소박한 착각이었다. 매년 에릭로메르적인 여름을 기대하지만, 현실은 매우 아핏차퐁위라세타쿤적인 것이다.

  • 많이 긴장했을 신랑 신부를 위해 호응과 박수 부탁드립니다.

    여행 도중 몇 달 전에 신청한 스피노자 『지성교정론』 강독 수업 영상을 부랴부랴 찾아 본다. 김은주 선생님의 번역본(도서출판 길)이 전자책으로 출시되지 않은 관계로 Edwin Curley의 영역본에 기대어 수업을 간신히 따라간다. 아직 1절에서 17절까지 밖에 후루룩 읽지 못해 한없이 과문하지만, 스피노자가 직접 쓴 문장으로 스피노자 철학에 입문하기에는 이만큼 좋은 저작이 없다는 것이 첫인상이다.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의 ‘방법’을 어느 지점까지 충실하게 상속하는지, 또한 어느 지점부터 ‘방법’을 새로운 윤리적 문제의식 속에서 불충실하게 전유하고 갱신하는지를 비교적 명확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강독을 마치면 페르디낭 알키에의 입문서격 저작부터 데카르트의 『정념론』까지 다시 처음부터 꼼꼼히 읽어 나갈 생각이다. 파리 서점에서 책 한 가득 이고 지고 메고 올 생각에 벌써 부터 정신이 아득해진다.

    L에게는 8월에 열리는 결혼식에 참석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드디어 소식을 전했다. 미안한 마음에 미루고 미뤄왔던 통보다. 일반 하객도 아니고 무려 사회까지 부탁 받았는지라 작년 말 부터 은근한 긴장 상태 속에서 별 볼 일 없는 사회자 멘트(“오늘 그 누구보다 빛나고 아름다운 우리 신랑 신부님은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주시길 바랍니다”)를 나름대로 준비했는데, 멀리서 축하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니 영 마음이 헛헛하다. (서글픈 건 단지 한여름 남산에서의 결혼식 후 뒤풀이 장소가 필동면옥일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다. 몇 주 동안 냉면이 눈 앞에서 아른거리기는 하는데 하여튼 진짜 아니다).

    축복을!